“친구가 번호 하나만 줬을 뿐이야.”
아무 의심 없이 전해진 연락처, 그 끝엔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 청부살인의 민낯, 수라윳 칸타 사건.
아무것도 모른 채, 번호 하나를 건넨 대가
방콕의 평범한 저녁, 갑작스러운 비명
2019년 6월 3일, 태국 방콕 외곽 지역. 저녁 7시경, 한 아파트 단지의 복도에서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쓰러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는 26세의 태국 여성 수라윳 칸타(Surayut Khanta). 평범한 회사원으로,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는 자취방으로 퇴근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흉기에 찔려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CCTV에는 범행 직후 모자를 눌러쓴 남성이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경찰은 곧 ‘우발적 강도’로 방향을 잡고 조사를 시작했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친구가 건넨 번호
경찰은 피해자의 휴대폰 통화기록과 메신저 대화를 분석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사건 발생 며칠 전, 수라윳이 친구와 나눈 짧은 대화였다.
친구: “너 그 일 아직 구하는 중이야?”
수라윳: “응, 뭐든 해보고 싶어. 소개해 줄 사람 있어?”
친구: “이 번호로 연락해 봐. 괜찮은 쪽이야. 좀… 특이하긴 하지만 돈은 돼.”
그 번호는 태국 현지번호가 아닌, 한국 국제번호로 시작되고 있었다.
수라윳은 그 번호로 직접 연락을 취했고, 그 이후 3일간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은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대화 내용은 전부 삭제되어 있었다.
CCTV 속의 남자, 그리고 연결된 한국인
수라윳을 살해한 남성은 사건 발생 2주 뒤, 태국 경찰의 수색 끝에 붙잡혔다.
그는 라오스 출신의 청부업자로, 혐의를 인정하며 이렇게 진술했다.
“인터넷으로 연락받았다. 여자를 죽이면 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 남자였다. 사진이랑 주소만 받았다.”
이후 국제 공조를 통해 추적된 결과, 실제로 한국 국적의 남성 A씨가 태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던 기록이 드러났다.
그는 중고나라와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고수익 해외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사람을 모집했고, 일부에게는 “데이터 수집용”이라며 타인의 정보 제공을 요구했다.
수라윳이 친구에게 받은 번호 역시, 이 남성이 관리하던 비공식 연락망 중 하나로 확인되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목숨을 건넨 사람들
이 사건의 가장 섬뜩한 부분은, 수라윳을 소개한 친구 또한 이 모든 상황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그녀는 조사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그냥 아르바이트 소개해주는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저도 거기다 제 친구 몇 명 소개한 적 있고, 직접 만나본 적도 없어요.”
결국, 그녀는 아무 의도 없이 친구에게 번호 하나를 건넸고, 그 번호는 죽음으로 향하는 통로가 되었다.
수사당국은 친구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후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이주해 연락을 끊었다.
한국에서의 수사, 그리고 ‘실패한 송환’
국제 공조 수사 끝에 A씨는 2020년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단지 해외 인력 소개업을 했을 뿐, 살인 교사는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범행에 직접 연결되는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송금 기록: 익명 코인을 이용한 거래, 추적 불가
연락 수단: 가상번호, VPN, 일회용 채팅 앱 사용
피해자와의 연결고리: 친구의 소개로 ‘자발적 연락’
결국 A씨는 국내에서 ‘해외 불법 취업斡旋’으로만 기소되었고, 살인 공모나 교사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태국 정부는 A씨의 범죄인을 인도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한국 측은 ‘국내법상 미확정 범죄’라는 이유로 인도 불가 결정을 내렸다.
A씨는 벌금형과 짧은 징역형만을 선고받고 2022년 말 석방되었다. 현재 그는 해외에서 다른 이름으로 활동 중이라는 소문만 무성하다.
흔적 없는 살인, 그림자 속의 범죄
이 사건은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청부살인의 공식을 따른다.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고, 누군가가 실행하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지시하며 그림자에 남는다.
무서운 건, 이런 범죄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실행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일회용 연락망
가상화폐로 자금 세탁
제3국의 범죄자를 고용하여 거리 두기
수라윳의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녀는 이 모든 시스템의 말단에서, 우연히 선택된 하나의 타깃이었을 뿐이다.